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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경(한국화)

춘경(한국화)

국명:
춘경(한국화)
영문:
 
형태:
 
소장:
문예역사관
구분:
 

상세설명

1943년에 남농 허건이 그린 춘경

노란 개나리와 옆으로 펼쳐진 잔잔한 강물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여유로워 보인다.

*남농

남농 허건은 조선조 철종 때 남화의 대가를 이룬 소치 허련의 손자이며 미산 허영의 아들로, 전통 남종화의 맥인 운림산방의 3대(소치 허련, 미산 허영, 남농 허건) 중 한 명이다. 5살 때까지 진도에서 살다가 아버지 미산 허영을 따라 강진으로 이사간 남농은 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그림 그리기에 더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미산은 그림쟁이의 배고픔을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그림 그리기를 만류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등 너머로 사군자를 익히면서 전국소년전람회에 첫 작품을 출품, 최고상을 받아 천부적인 재질을 드러냈다. 목포에서 평생을 보내면서 한국 남종화에 뛰어난 예술의 향기를 뿌리며 백포, 포전, 아산 등 기라성 같은 후진들을 양성하였고, 수많은 상을 수상하며 한국 예술원 원로회원의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사재로 기념관을 건립하였고, 평생 수집한 수석, 자기, 목물과 운림산방 3대 작품들을 향토문화관에 기증하여 문화 발전에 큰 힘이 되어서 우리 예술계에 문화유산을 사회에 환원시킨 본보기가 되었다.

*운림산방

소치 허유(小痴 許維)의 고택. 남종문인화의 대가 소치 허유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며 소치 허유가 말년에 기거하던 화실의 당호로 일명 운림각이라고도 한다. 미산도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의제 허백련이 미산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익힌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유서깊은 운림산방은 소치(小痴) - 미산(米山) - 남농(南農) - 임전(林田) 등 4대에 걸쳐 전통 남종화를 이어준 한국 남종화의 본거지이다

*남종화(南宗畵)

명(明)나라 때 막시룡(莫是龍)·동기창(董其昌)이 제창한 화가의 계통 및 화풍으로 남화(南畵)라고도 한다. 북종화(北宗畵)에 대응되는 말이다. 북종화가 화원(畵員)이나 직업적인 전문화가들을 중심으로 경직(硬直)된 선묘를 사용하여 그린 장식적이면서도 공필(工筆)의 그림을 의미하는 데 반하여, 남종화는 대체로 인격이 고매하고 학문이 깊은 사대부(士大夫)가 여기(餘技)로 수묵과 담채(淡彩)를 사용하여 그린 간일(簡逸)하고 온화한 그림이다. 당나라 초기 남북2종설(南北二宗說)은 명나라 때 동기창이 《화지(畵旨)》, 《화안(畵眼)》 등 그의 문집 속에서 당대(唐代) 선종(禪宗)에 남·북종이 있음을 주목하고, 회화에서도 남·북종의 구분을 한 데서 비롯된다.

*한국의 남종화

한국에서는 정형화된 남종화가 조선 숙종 후반기에 도입되기 시작하여, 영조·정조 된 조선 말의 문인화풍은 근대화단으로 계승되어 오늘날까지 맥을 잇고 있다.

전라남도·전남대호남문화연구소,“전남향토문화 백과사전”, 태학사, 2002 / 장경희 외 편저, "한국미술문화의 이해", 예경, 1994. / http://www.tournamdo.org이후 주도적인 화풍으로 보급되었다.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畵譜)》 등 명·청 남종화계 화보류(畵譜類)의 영향으로 보급된 남종화는 심사정(沈師正)·강세황(姜世晃)·이인상(李麟祥)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남종화풍의 진정한 보급과 토착화는 김정희파(金正喜派)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서화본일률(詩書畵本一律)을 추구한 김정희의 작품은 중국 문인화에 비해 손색이 없으며, 그의 영향 아래 허유(許維)·조희룡(趙熙龍)·전기(田琦) 등 여러 화가가 배출되었다. 그 밖에도 묵란(墨蘭)의 대가 이하응(李昰應)·민영익(閔泳翊) 등에 의해 진작(振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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