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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경성의보부족 (서예)

춘경성의보부족 (서예)

국명:
춘경성의보부족 (서예)
영문:
 
형태:
 
소장:
문예역사관
구분:
서예

상세설명

소전 손재형의 작품 <춘경성의 보부족>

◎ 작가소개

*손재형

작가인 소전 손재형은 추사이래의 대가로 추앙 받을 정도로 우리나라 서예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소전 손재형은 우리나라 한자 문화의 정수인 서예를 오늘날에 이어온 서예계의 거목이다. 호는 소전, 이름은 손재형. 아명은 판돌(判乭)이다. 소전은 1903년 4월 28일 아버지 영환이 25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지 6일만에 진도읍 교동리에서 태어난 유복자다. 다시 3천 석군을 자랑하던 부유한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란 그는 5살 때부터 할아버지인 옥전(玉田) 손병익(孫秉翼)의 슬하에서 한학과 서법의 기본을 익혔으니, 어릴때부터 서예에 남다른 재질을 가졌다. 흔히 소전을 가르켜 앞으로 1세기 안에 나타나기 힘든 서예가라는 말을 한다. 그는 아홉 차례 심사위원을 지낸 뒤에는 두 차례에 걸쳐 국전 고문을 지냈고 국전 심사위원장 한 번. 국전 운영위원장 두 번. 예총회장 두 번 등을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8·15해방을 맞으면서 소전은 본격적인 그의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일본에서 통용되는 서도(書道)라는 용어 대신(중국에서는 서법) 서예로 할 것을 들고 나왔다. 이것은 일본에서 통용되는 불쾌한 기억을 씻어 보자는 의미도 있지만 동양적 서예관에서 서즉화(書卽畵), 화즉서라는 전통적 의미와 함께 현대의 예술성을 띄고 새로운 서예운동에 적극 참여한다는 민족적 의지의 표현이라 하겠다. 이러한 새로운 발상에 전 서예인들이 동조하고 나서 오늘날 서예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1945년 조선서화 동연회(同硏會)를 창립 선전이 없어진 문화적 공백기를 메웠으며 그것이 국전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장년기에 들어 소전의 글씨는 더욱 원숙해졌다. 자획과 구성에 무리가 없고 문기가 넘치는 그의 글씨는 보는 이의 저항감을 전혀 일으키지 않는데 특색이 있다. 수차례에 걸쳐 중국에 다녀와 중국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확립하여 이른바 소전체라 불리는 서체를 만들어 냈다. 선생의 글씨에 나타난 완숙이나 세련도는 그만이 도달한 높은 경지라는 평을 받았다. 특히 극치를 이룬 것은 1955년 고향인 고군면 벽파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 혼용비인 이충무공 전첩비문이다. 점, 선, 횡획, 종획등의 변화무쌍한 조화다. 전체적인 리듬이 금세의 역작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선생의 재질과 노력이 민족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어울려져 결집된 소전예술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 대표작으로는 진해 해군 충효탑 비문과 서울 사육신 비문 등이 꼽힌다.

- 소전의 제자들

그가 길러낸 제자들은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 학남(鶴南) 정항섭(鄭恒燮), 경암(景岩) 김상필(金相筆), 서봉(西峰) 김사달(金思達), 장전(長田) 하남호(河南鎬), 평보(平步) 서희환(徐희煥)등 한국 서예의 기둥들이 즐비하다. 구철우는 “우리나라 서예가들 두어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의 제자”라고 말하는가 하면 31살 때부터 소전의 가르침을 받은 하남호는 “작품을 쓰면 선생은 절대 잘못된 점을 섣불리 지적하지 않아 몇 번이고 써 보게 해 그 스스로 잘못을 발견하게 하여 최종적으로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참고문헌>

두산백과사전 / http://hijindo.hihome.com / http://kr.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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