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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100,000 PESOS

아르헨티나 100,000 PESOS

국명:
아르헨티나 100,000 PESOS
영문:
 
형태:
 
소장:
문예역사관
구분:
지폐

상세설명

<정의>

아르헨티나지폐 100.000 PESOS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아르헨티나 100.000 PESO 지폐로 앞면에는 산 마르틴의 초상이 있고, 뒷면에는



<세부사항>

*산 마르틴(Jos de San Martin 1778∼1850)

아르헨티나 군인. 야페유 출생.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와 함께 남아메리카 독립을 지도했다. 7세에 가족과 함께 에스파냐로 건너갔고, 11세에 에스파냐군에 입대하여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1810년 5월에 시작된 아르헨티나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1812년 3월 귀국하였다. 에스파냐시절의 군력(軍歷)을 인정받아 즉시 독립군 장교로 임명받았으며, 1813년 2월 산로렌소전투에서 승리하여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1814년 1월 당시 알토페루(지금의 볼리비아)의 왕당파군과 격렬한 공방전을 되풀이하고 있던 북부군의 총사령관으로 발탁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총사령관시절에 알토페루 공략을 위하여, 먼저 안데스산맥을 넘어서 칠레의 왕당파를 타도하고, 이어서 페루를 해방시키며, 페루에서 알토페루를 공략한다고 하는 대규모의 우회작전을 착상했고, 1814년 9월 멘도사주의 지사로 임명되자, 이 작전의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인마(人馬)의 훈련에 2년여를 소비한 뒤, 17년 1월 5000명이 넘는 군사와 우마(牛馬) 등을 이끌고 안데스를 넘는 어려움을 감행했다. 2월 차카부코전투에서 칠레의 왕당파를 격파하고, 또한 이듬해 4월 마이푸전투에서 승리하여 18년 2월 칠레의 독립을 확고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어서 20년 8월 페루공략에 착수했고, 이듬해 7월 페루를 해방시켜, '페루의 보호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알토페루의 해방에는 병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1822년 7월 남아메리카 북부를 해방시키고 남하하고 있던 볼리바르와 에콰도르의 과야킬에서 회견하고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였다. 이로 인해 그 후 독립전쟁지휘를 볼리바르에게 맡기고 일체의 공직을 사임하고 페루를 떠나 유럽에서 은둔생활을 보냈다. 1829년에 한 차례 귀국을 시도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으나, 내란에 휩싸인 조국의 모습에 실망하여, 하선(下船)하지 않은 채 유럽으로 되돌아간 후 다시 조국의 땅을 밟지 않았다. 아르헨티나뿐만 아니라 칠레와 페루의 해방에 공헌한 공적을 기려서 아르헨티나에서는 그의 기일(忌日)인 8월 17일을 '해방자의 날'로 정하여 축일(祝日)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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