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검은 국화와 풀이 음각된 청자주전자.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며 가로 9.0 세로 9.0 높이 21.0이고, 뚜껑이 있으며 뚜껑 앞 쪽에 고리가 있어 여닫기 편하게 되어있다. 바깥부분에는 검은국화와 풀이 음각 되어있다.
<세부사항>
*청자
청자란, 철분이 조금 섞인 백토(白土)로 만든 형태 위에 철분이 1∼3% 들어 있는 장석질(長石質) 유약을 입혀 1250∼1300℃에서 환원염으로 구워낸 것이다. 일반적으로 맑고 푸른색을 띠는데 이것은 유약과 바탕흙[胎土]에 들어 있는 미량의 산화제이철이 강한 환원소성(還元燒成)으로 인하여 산화제일철이 되기 때문이다. 청자의 바탕흙·유약 및 굽는 방법 등은 지역·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이에 따라 자기의 색도 조금씩 다르다. 이러한 청자는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져 동양의 도자기 역사에 기맥을 형성하는 기본적 요소가 되었다
<발달과정 및 역사>
*우리나라 청자의 역사
8세기 무렵부터 회유토기가 발달하여 청자제작의 기반이 확립되었고 당나라 도자기가 유입되었다. 9세기 무렵부터는 중국 저장성 웨저우지방 청자와 그 기술이 유입되어 서남해안의 가마에서 일훈문굽계청자(日暈文-系靑磁;햇무리굽청자)가 제작되었다. 이어서 질이 떨어지는 조질(粗質)의 값싼 청자가 역시 서남해안에서 생산되어 일반 백성들의 수요에 충당되었는데 이를 녹청자(綠靑磁)라 하였다. 그 뒤 고려 초에 강진(康津)·부안(扶安)·개경(開京: 開城)으로 이어지는 관요가 형성되고 중국 남북방 가마의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하여 청자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고려청자의 발생시기는 11세기 초 무렵으로 추측되며, 이때 비색청자가 제작되었다. 비색청자의 특색은 유약이 두껍고 고르게 발라짐으로써 가능한 깊고 은은하며 맑은 발색(發色)에 있었다. 그 뒤 의종 때(1147∼70) 상감청자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상감청자는 상감무늬를 전면적으로 쓸 경우에도 배경으로 여백을 남길 정도로 충분한 공간이 있고, 성격이 다른 몇 가지 무늬를 통일적으로 배열하여 화폭과 같은 효과를 낸다. 당시 상감청자 외에 무늬 없는 청자도 제작되었다. 13세기 중반에서 14세기 중반에 걸쳐 고려청자가 쇠퇴해갈 무렵에는 국가의 말기적 증상이 반영되어 청자기의 퇴조를 보이는데, 표면이 황록색조를 띠거나 비색을 잃으면서 상감무늬도 산만하고 조잡해지며 같은 무늬가 반복 사용된다. 형태는 매병(梅甁)이 줄어드는 대신 접시류가 늘고 대접은 안이 깊어지며 측면이 평평한 광구대(廣口臺)가 된다. 이 밖에 진사(辰砂)·화청자와 같은 특수한 상감청자도 만들어졌다. 조선 초기 청자는 고려 말 퇴락한 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1 청자를 계승한 것과 새로운 백자가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으로 크게 구분된다. 앞의 것은 고려 말의 조질청자보다 질이 향상되고 자기 형태에 생동감이 있으며 무늬가 활발해져 초기 분청사기상감과 기형·무늬가 거의 같다. 뒤의 것은 백자 바탕흙에 청자 유약을 입힌 것으로 기형도 새로운 백자와 거의 같은데 음각무늬가 있는 것도 있다. 이 두 계통은 15세기 중반까지 모두 질이 양호하였으나, 15세기 후반부터 고려청자를 계승한 청자는 사라지고 새로운 조선청자만이 백자가마에서 적은 양이 생산되어 17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참고문헌>
두산 백과사전 / 야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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