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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형축음기

나팔형축음기

국명:
나팔형축음기
영문:
 
형태:
 
소장:
문예역사관
구분:
기타

상세설명

<정의>

원반(圓盤)에 홈을 파서 소리를 녹음하고 바늘을 사용해서 이것을 소리로 재생시키는 장치.

<세부사항>

*우리나라 축음기의 역사

우리나라에 축음기와 레코드가 소개된 것은 1890년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에 의한 우리 나라 최초의 음반은 1907년 3월에 발매된 미국 컬럼비아(Columbia)사의 음반이다. 그러나 1885년 빅터(Victor)사에서 취입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경기명창 박춘재의 녹음이 우리 음반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1907년 6월 주한 미국 영사 알렌의 주선으로 `시카고박람회`에 참가했던 10명의 국악인 일행 중 박춘재가 레코딩을 했다는 기록에 근거한다. 1908년에는 일본 오사카에서 취입하여 미국에서 생산된 빅터사의 음반이 소개되었다. 이후 컬럼비아, 빅터의 두 회사는 1911년까지 우리 전통음악, 기타 서양음악, 일본음악을 중심으로 100여종의 음반을 발매하였는데, 이들의 우리 음악 레코드 발매는-유성기 판매가 목적 이었다.

1910년의 한일합방으로 일본은 한국음반시장을 장악하게 되었다. 한일합방을 계기로 일본축음기상회는 1911년 국내에 진출하여 1928년까지 500여종의 우리 나라 전통음악, 클래식, 대중음악을 발매하며 레코드산업을 성장시켰다. 그러나 일본은 식민지에 생산공장을 두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음반의 국내제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우리나라를 상품시장으로 간주한 (일본축음기상회)는 음반구매자가 한국인이므로 한국인의 음반을 취입하긴 했으나 음반 취입자를 일본으로 데려가 음반을 녹음, 제작한 후 완제품을 다시 한국으로 가져와 판매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당시의 축음기와 음반 가격은 상당히 비싼 편이었기 때문에 실제적 수요는 많지 않은 상황 이었다. 축음기와 음반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26년 7월 17일 동경에서 취입 된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높은 판매량을 올린 이후이다. 노래의 취입을 마친 가수 윤심덕이 그의 연인과 투신자살한 사건이 화제가 되어 일반 소비자들이 `사의 찬미`를 듣기 위해 레코드 와 축음기를 구매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나팔통식 양면 SP(Standard Play)에 의해 주도되던 우리나라의 레코드산업은 1928년 전기식 SP가 도입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자체 음반생산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일본을 통해 서울에 지사를 설립한 빅터(1927), 컬럼비아(1928), 폴리돌 (Polydor, l930)등의 외국 회사들을 통해 음반발매가 이루어졌다.

1933년에 설립된 오케(Okeh)레코드사는 최초로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음반회사로, 일본제국축음기회사와 기술 제휴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국의 오리엔트 레코드사, 625이후 피난시절 부산에서 도미도와 스타, 1954년 아세아, 미도파음반공사(현재 (주)지구레코드의 전신)가 설립되었으며, 이후 킹스타, 신세기, 오아이스, 삼성, 평화 등이 설립되었다. SP가 아닌 LP(Long Play)는 1956년에 도입되었는데, 당시의 LP는 모노 녹음으로 제작된 10인치 LP로, 1950년대 말까지 SP와 10인치 LP를 발매했던 음반회사는 킹스타, 신세기, 오아시스, 유니버셜, 대도, 도미도, 미도파, O.S, 고려, 국제, 내쇼날음향, 라미라, 미미, 뷔너스, 서울, 신성, 신태양, 아세아, 오메가, 오스타, 컬럼비아, 태평양, 한일, 홈런, 나하나레코드사 등이다. 10인치 LP는 1962년에 12인치 LP로 발전하였고 다음해에는 스테레오 녹음 방식의 12인치 LP로 발전하게 된다.

해방 이 후 자체기술과 설비에 의해 음반을 발매하면서 순수 한국음반산업의 도입기를 거친 음반업계는 1960년대 들어 정착기에 돌입하게 된다. 1964년 4월 3일에는 사단법인 대한레코드제작자협회가 설립되었는데 이는 음반 제작사와 음반판매업자의 협조를 통한 최초의 음반단체였다는데 의의를 지니는데 대한레코드제작자협회는 이후 67년에 한국음반협회로 변경되었다가 70년에 해산, 72년에 부활되었다. 1968년에는 음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어 음반산업의 정비를 가능케 하는 토대를 이루었고, 스테레오 방송과 FM이 개국 되어 전문 음악방송이 실시되면서 음반업계 활성화의 계기가 되었다. 특히 라디오는 가요발전에 큰 영향을 미침으로써 가요가 음반산업을 주도하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외국음악의 경우, 6.25전쟁 이후에 주한미군과 AFKN방송에 힘입어 팝음악이 널리 보급되었는데, 이로 인해 60년대 말까지 우리나라에는 팝송 복각음반 (미군 PX에서 구한 오리지널 음반을 복제해서 만든 `백판`을 의미한다)의 제작, 판매가 성행하게 되었다.

내에는 한 군데의 레코드 생산 공장도 없었으며, 녹음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으므로, 음반은 여전히 일본에서 취입, 제작되었다. 오케의 다동 녹음실, 폴리돌의 충무로2가 녹음실, 컬럼비아의 국도극장 뒷골목 대정관 극장 녹음실이 갖춰진 40년대 이후에야 국내취입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음반의 제작은 일본에서 이루어졌다. 일본에 예속되어 있던 우리나라 음반산업이 실질적으로 시작된 것은 1945년 해방이후 부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자체적으로 녹음, 생산의 전 과정을 담당한 최초의 음반은 1945년 오케에서 발매된 양면 SP판으로, 앞면에 장세정의 `울어라 은방울’뒷면에 `백팔번뇌`가 실려 있었다. 1946년 부산에서 코로나, 1947년 고려, 명동의 럭키,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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