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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보(넓은 테두리)

조선통보(넓은 테두리)

국명:
조선통보(넓은 테두리)
영문:
 
형태:
 
소장:
문예역사관
구분:
동전

상세설명

<정의>

조선시대 화폐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옆모양이 넓은 것과 가는 것으로 나누어 지는데 위 유물은 테두리가 넓은 조선통보이다.



<세부사항>

*조선통보

세종 5년(1423년)조선시대 최초의 동전인 '조선통보'의 발행 하였다. 정부는 조선통보의 유통을 촉진하기 위하여 '조선통보 전용령'을 공포하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하였으나 잘 유통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면직물류의 포화가 주로 유통되고 있었으며, 소액 거래에는 미두(米豆)가 사용되었다.



<발달과정 및 역사>

*조선통보의 역사

1425년(세종7년)에 주조된 것으로서 10돈쭝을 1냥으로 하여 저화와 함께 유통되었다.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동전이지만 유통은 그리 활발하지 못하였다. 조선통보가 주조 된 것은 액면가치가 큰 저화만으로는 소액거래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때 발행된 동전이 바로 해서체의 조선통보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으로서 중국동전에 비해 손색이 없고, 매우 정교 하였다. 발행 당시 저화를 고액 거래에, 그리고 조선통보를 소액거래에 사용 할 예정이였으나, 1425년 조정에서는 그때까지 사용되던 저화 대신 동전만을 사용하게 하고 저화 1장에 조선통보 1문을 교환 해 주었다. 조선통보의 교환가치는 발행 초에 면포1필 당 20여문이였으나 2년 뒤인 1425년 6월에는 300~400문으로 하락했다. 정부는 이러한 동전의 가치 하락이 공급과잉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동전 공급을 중지 하였으나, 그 원인이 명목가치가 실질가치보다 높은 데서 생긴것이였기 때문에 도리어 조선통보에 대한 불신감만 조성되었다.

당시 동전의 주요 원료인 구리는 주로 일본에서 수입하는 처지였으므로 동이 부족한 실정이였다. 때문에 1423년 11월~1427년1월 사이 동전주조의 총액은 약 40만냥에 불과했고, 이 중에서 시중에 유통된 것은 10만냥 뿐 이였다고 한다. 이것은 동전이 화폐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양이였다. 민간보다 조정이나 고관집 등에서 널리 사용된 조선통보는 1445년 이후 저화의 재발행으로 인해 버림받는 처지가 되었다가 1633년에 팔분서체로 다시 주조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의 화폐박물관"4 p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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