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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다리접시

굽다리접시

국명:
굽다리접시
영문:
 
형태:
 
소장:
문예역사관
구분:
도자기

상세설명

<정의>

접시 아래에 다리처럼 긴 굽이 붙은 토기

<일반적 형태 및 특징>

6세기 삼국시대 것으로 추정되며 뚜껑이 없으며 상태는 양호한 편이고, 다리에 구멍이 길다란 네모꼴로 나있다.

<세부사항>

*굽다리접시

모양이 목제 제기처럼 생겼기 때문에 한자로는 고배(高杯)로 부르며, 뚜껑의 유무에 따라 유개고배(有蓋高杯)와 무개고배(無蓋高杯)로 나누어 부른다.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토기 중에도 비슷한 기종이 간혹 보이지만, 삼국시대와 신라 통일기에 주로 유행하였다. 지기(祭器)의 일종으로 신라·가야지역의 고분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발견되며, 회청색의 경질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영남지방의 굽다리접시는 한반도 서북지방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낙랑 유적인 왕광묘(王光墓)에서 발견된 나무로 만든 나무굽다리접시[木豆]와 흡사한 칠두(漆豆)가 기원전 1세기경으로 편년 되는 창원의 다호리(茶戶里)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이러한 목두나 칠두의 전통 위에서 기원 3세기경부터 흙으로 만든 굽다리접시가 영남지방에 본격적으로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굽다리접시는 뚜껑이 없고 다리에도 구멍이 뚫리지 않은 형태였는데, 4세기부터는 다리에 장방형 투공(透孔)이 생기고 아울러 뚜껑을 갖춘 예가 많아졌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 ·서안의 굽다리접시가 형태와 장식면에서 차이를 보이기 시작하여, 흔히 신라식과 가야식으로 구분되었다. 낙동강 서안의 성주(星州)를 포함하여 낙동강 동안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신라식은 대체로 뚜껑과 그릇이 두툼한 모습이고 다리가 날씬하며, 다리의 투공이 위아래 서로 엇갈리게 배치되는 예가 많다. 반면 낙동강 서안의 가야식은 뚜껑과 그릇 모두 납작한 형태이고, 다리가 굵으며 다리의 구멍은 위아래 한 줄로 배치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가야가 신라에 완전히 병합된 6세기 후반 이후 굽다리접시는 다리가 현저히 짧아지고 거기에 뚫린 투공 역시 매우 작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신라 통일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심해져, 짧은 다리, 사발 모양의 몸체, 아주 작은 구멍 등은 통일기 굽다리접시의 대표적인 특징이 되었다.

한편 통일기의 굽다리접시 중에는 몸체에 귀 모양의 손잡이가 두 개 붙은 예도 많이 보인다. 그러나 통일기 초기에 뚜껑 있는 굽다리접시가 먼저 사라지더니, 결국 8세기 이후에는 굽다리접시 자체가 소멸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1 / 국립 중앙 박물관 홈페이지 / 두산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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